
폴 토마스 앤더슨이 장르 영화를 만들면 벌어지는 일
폴 토마스 앤더슨(Paul Thomas Anderson). 이 이름 석 자만으로 영화팬의 자세가 달라진다. 부기 나이츠(1997), 매그놀리아(1999), 데어 윌 비 블러드(2007), 팬텀 스레드(2017), 리코리스 피자(2021)까지, 그가 손대는 모든 작품은 할리우드 주류와는 결이 다른 질감을 품어왔다. 아카데미가 사랑하는 감독이면서도 결코 아카데미의 취향에 맞추지 않는 사람. 그런 그가 스릴러, 범죄, 코미디 장르를 섞은 162분짜리 대작을 들고 나왔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One Battle After Another, 2025)다.
이 영화의 태그라인은 “반드시 싸워야 하는 전투가 있다”이다. 장르 영화의 문법을 빌려오되, PTA 특유의 인물 중심 서사와 묵직한 감정선을 결합한 이 작품은 2025년 9월 23일 개봉 당시 상당한 화제를 모았다. 1억 7,500만 달러라는, PTA 필모그래피 중 역대 최고 수준의 예산이 투입되었고, 전 세계적으로 2억 937만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예술 영화의 거장이 상업적 스케일까지 손에 쥔 셈이다.

줄거리: 혁명가의 추락, 그리고 아버지의 전쟁
주인공 밥 퍼거슨(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은 한때 자유를 외치던 혁명가였다. 시대의 부름에 응답했고, 대의를 위해 모든 것을 걸었다. 하지만 영화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그는 16년 전 혁명의 후유증에 짓눌린 채 무너진 삶을 살고 있다. 영웅의 서사는 끝난 지 오래고, 남은 것은 깨진 관계와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뿐이다.
밥에게 유일한 희망이자 삶의 이유가 있다면, 바로 딸 윌라다. 그런데 그 딸이 과거의 숙적 스티븐 J. 록조 대령(숀 펜)에게 납치당한다. 혁명 시절의 원한이 16년의 세월을 뚫고 가장 잔혹한 방식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밥은 딸을 되찾기 위해 흩어진 옛 동료들을 하나둘 모으기 시작한다. 그중 한 명이 센세이 세르히오 세인트 카를로스(베니시오 델 토로), 그리고 또 한 명이 디앤드라(레지나 홀)다.
이 줄거리만 보면 전형적인 구출 액션처럼 들릴 수 있다. 하지만 PTA는 ‘구출’이라는 목표를 향해 직선으로 달리지 않는다. 밥이 동료들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16년간 묻어둔 감정과 대면하는 여정이 되고, 각 인물이 품고 있는 혁명 이후의 상처가 영화의 진짜 이야기를 구성한다. 162분이라는 러닝타임은 이 감정의 고고학을 위해 존재한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PTA의 첫 만남
이 영화에서 가장 주목할 조합은 단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폴 토마스 앤더슨의 첫 협업이다. 디카프리오는 마틴 스코세이지와의 오랜 파트너십(갱스 오브 뉴욕, 에비에이터, 디파티드, 셔터 아일랜드,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킬러스 오브 더 플라워 문)으로 잘 알려져 있고, 퀜틴 타란티노와도 장고: 분노의 추적자,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에서 인상적인 작업을 했다. 크리스토퍼 놀란(인셉션),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등 거장들과 꾸준히 호흡해 온 배우다.
그런 디카프리오가 PTA와 처음 만났다는 사실 자체가 영화팬에게는 일종의 이벤트다. PTA는 과거 다니엘 데이-루이스(데어 윌 비 블러드, 팬텀 스레드), 호아킨 피닉스(더 마스터, 인히어런트 바이스), 아담 샌들러(펀치 드렁크 러브) 등 배우의 전혀 다른 면모를 끌어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디카프리오가 이 감독의 손에서 어떤 새로운 결을 보여주는지가 영화의 핵심 관전 포인트 중 하나였다.
디카프리오는 2016년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오랜 ‘만년 후보’ 징크스를 깨뜨린 바 있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에서 그는 무너진 혁명가의 내면을 연기하며, 레버넌트 때와는 또 다른 종류의 육체적, 정신적 극한을 보여준다.
숀 펜, 베니시오 델 토로, 레지나 홀: 빈틈 없는 앙상블
악역 스티븐 J. 록조 대령을 맡은 숀 펜은 미스틱 리버(2003)와 밀크(2008)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두 차례 수상한 배우다. 그의 존재감은 독특하다. 화면에 등장하는 것만으로 불안과 위협의 공기가 깔린다. 록조 대령이라는 캐릭터는 단순한 악당이 아니라, 밥의 거울상 같은 존재로 설계되어 있다. 같은 전쟁을 치렀지만 정반대의 방향으로 걸어간 두 남자의 대결은 이 영화의 긴장감을 떠받치는 기둥이다.
베니시오 델 토로가 연기하는 센세이 세르히오 세인트 카를로스는 밥의 옛 동료로, 이름부터 범상치 않은 이 인물은 영화의 코미디적 색채를 담당한다. 델 토로는 트래픽(2000)으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했고, 21그램, 시카리오 시리즈 등에서 묵직한 연기를 보여준 배우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무겁고 가벼운 것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며, PTA 영화 특유의 톤 변화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레지나 홀이 맡은 디앤드라 역시 주목할 만하다. 홀은 무서운 영화 시리즈로 대중에게 알려졌지만, 서포트 더 걸스(2018), 나인 데이즈(2020) 등에서 진지한 드라마 연기력을 인정받아 온 배우다. 이 영화에서 그녀는 밥의 팀에 합류하는 핵심 인물로, 스릴러와 코미디를 넘나드는 장르적 변주 속에서 감정적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조니 그린우드의 음악: PTA 영화의 또 다른 주연
PTA 영화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있다. 라디오헤드의 기타리스트이자 작곡가 조니 그린우드(Jonny Greenwood)다. 두 사람의 협업은 데어 윌 비 블러드(2007)에서 시작되었다. 그린우드가 만들어낸 불협화음과 미니멀한 현악 편곡은 다니엘 데이-루이스의 광기 어린 연기와 맞물려 영화사에 길이 남을 사운드트랙을 탄생시켰다.
이후 더 마스터(2012), 인히어런트 바이스(2014), 팬텀 스레드(2017), 리코리스 피자(2021)까지, 그린우드는 PTA의 거의 모든 작품에 음악을 입혔다. 록 뮤지션이라는 배경이 무색하게, 그의 영화음악은 클래식 작곡가 못지않은 깊이와 실험성을 갖추고 있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에서도 그린우드의 음악은 혁명의 잔해 위에 깔리는 긴장과 서정을 동시에 전달하며, 영화의 감정적 밀도를 한 단계 끌어올린다.
흥행 성적: PTA의 새로운 기록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1억 7,500만 달러의 예산을 들여 전 세계에서 2억 937만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PTA의 전작들과 비교하면 이 숫자의 의미가 선명해진다. 리코리스 피자(2021)의 전 세계 수익이 약 3,250만 달러, 팬텀 스레드(2017)가 약 4,780만 달러였던 것을 감안하면,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PTA 커리어 최대의 상업적 도전이자 기록이다.
물론 제작비 대비 수익률만 놓고 보면 넉넉한 흑자라 보기 어려운 구간이다. 마케팅 비용까지 고려하면 손익분기점에 근접하거나 약간의 이익을 본 수준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PTA의 영화가 이 정도 규모의 예산으로 제작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할리우드에서 작가주의 감독의 위상이 어떤 수준에 올라 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다. 디카프리오의 스타 파워가 이 프로젝트를 가능하게 한 핵심 요인이었을 것이다.
장르의 경계에서: 스릴러, 범죄, 코미디의 삼중주
이 영화의 장르 분류는 스릴러, 범죄, 코미디다. 언뜻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지만, PTA에게는 자연스러운 선택이다. 부기 나이츠에서 포르노 산업을 드라마와 코미디로 다뤘고, 인히어런트 바이스에서 범죄 느와르를 스톤드 코미디로 해체했던 감독이 아닌가. 그에게 장르란 규칙이 아니라 재료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에서 코미디 요소는 주로 밥이 옛 동료들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혁명이 끝난 뒤 각자의 방식으로 기괴한 삶을 살고 있는 동료들의 모습, 그리고 이들이 다시 한 팀으로 뭉치는 과정의 불협화음이 웃음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딸의 납치라는 중심 서사가 있기에 긴장감은 결코 풀리지 않고, 이 둘 사이의 균형이 영화의 독특한 톤을 형성한다.
162분이라는 러닝타임은 PTA 영화치고도 긴 편이다. 매그놀리아(188분), 데어 윌 비 블러드(158분)와 비교할 만한 길이로, 관객에게 일정 수준의 인내를 요구한다. 하지만 PTA의 장편은 언제나 그 길이만큼의 밀도를 제공해 왔고, 이 작품도 그 전통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관객 평가와 의미
현재 TMDB 기준 7.4/10(3,170명 평가)의 평점을 기록하고 있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PTA의 필모그래피에서 상당히 대중 친화적인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데어 윌 비 블러드나 더 마스터 같은 작품이 평단의 극찬 속에서도 대중적 접근성에서 호불호가 갈렸던 것과 비교하면, 스릴러라는 장르적 뼈대가 관객 유입에 효과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PTA 팬들 사이에서는 장르적 타협이 아쉽다는 의견과, 장르를 도구로 활용하면서도 자신의 색깔을 잃지 않았다는 평가가 공존한다. 어느 쪽이든, 디카프리오와 PTA의 조합이 만들어낸 화학작용은 향후 두 사람의 재협업에 대한 기대를 높이기에 충분하다.
트리비아: 알고 보면 더 흥미로운 이야기들
1. 디카프리오-PTA, 왜 이제서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폴 토마스 앤더슨은 같은 시대, 같은 할리우드에서 활동해 왔지만 한 번도 함께 작업한 적이 없었다. 디카프리오는 스코세이지, 타란티노, 놀란, 이냐리투 등 거장들과 폭넓게 협업해 온 반면, PTA는 다니엘 데이-루이스, 호아킨 피닉스 같은 배우들과 깊은 반복 작업을 선호해 왔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에서의 첫 만남은 두 사람의 커리어 궤적이 마침내 교차한 순간이라 할 수 있다.
2. PTA와 조니 그린우드, 20년 가까운 동행
조니 그린우드가 PTA 영화에 음악을 맡기 시작한 것은 2007년 데어 윌 비 블러드부터다. 라디오헤드의 리드 기타리스트로서의 정체성과 영화 작곡가로서의 정체성을 병행해 온 그린우드는, PTA 영화의 음악적 정체성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사람의 협업은 약 20년에 걸쳐 이어지고 있으며,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에서도 그 파트너십은 건재하다.
3. 숀 펜의 아카데미 2관왕 이력
숀 펜은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미스틱 리버(2003)와 거스 반 산트 감독의 밀크(2008)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두 차례 받은 배우다. 항상 강렬한 캐릭터를 맡아온 그에게 ‘록조 대령’이라는 악역은 새로운 종류의 카리스마를 발휘할 수 있는 역할이다.
4. 제작비 1억 7,500만 달러의 의미
PTA의 전작들은 대부분 2,000만~4,000만 달러 선에서 제작되었다. 이번 작품의 1억 7,500만 달러는 그의 커리어에서 전례 없는 규모다. 디카프리오의 합류가 이 스케일의 투자를 가능하게 한 핵심 요인이었을 것이며, 이는 스타 파워와 작가주의가 공존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5. 영화 제목의 함의
“One Battle After Another”라는 제목은 혁명가 밥의 삶 자체를 요약한다. 혁명이라는 전투를 치렀고, 이후 16년간 트라우마라는 전투를 치렀으며, 이제 딸을 구하기 위한 또 다른 전투에 나선다. 끝나지 않는 전투의 연속, 그것이 이 영화가 바라보는 인생의 모습이다.
OTT/스트리밍으로 감상을 권합니다
2025년 9월 개봉작인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극장 상영을 마친 지 꽤 시간이 지났다. 현재는 OTT나 스트리밍 플랫폼을 통해 감상할 수 있는 시점이다. 162분의 러닝타임은 집에서 편하게 몰입하기에 오히려 적합할 수 있다. PTA 특유의 긴 호흡과 정교한 연출, 디카프리오의 새로운 면모, 그린우드의 사운드트랙을 충분히 음미할 수 있는 환경에서 감상하길 추천한다.
폴 토마스 앤더슨의 작품 세계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그가 장르적 틀 안에서도 자기 자신을 잃지 않는 방식에 감탄할 것이다. PTA를 처음 접하는 관객이라면, 이 영화가 그의 방대한 필모그래피로 들어가는 흥미로운 입구가 될 수 있다. 어느 쪽이든,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한 번 이상 곱씹어 볼 가치가 있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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