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년 5월 21일, 영국발 한 편의 코미디가 극장에 도착했다. 제목부터 도발적이다. 레이디스 퍼스트: 거꾸로 가는 남자(Ladies First). 영어 원제는 단순히 두 단어인데, 한국 배급사는 부제로 “거꾸로 가는 남자”를 붙였다. 영화의 정체성을 한 줄로 압축한 카피다. 돈과 권력, 가벼운 연애로 가득 찬 삶을 누리던 오만한 바람둥이가 어느 날 눈을 떠보니 여자가 지배하는 평행 세계에 와 있다는 설정. 멜 깁슨이 여자 마음을 읽었던 2000년작 왓 위민 원트나, 1991년 엘렌 바킨 주연의 스위치(Switch)가 떠오르지만, 이 영화는 한 발 더 나아간다. 한 남자만 바뀐 게 아니라, 세계가 통째로 뒤집힌다.
주연은 코미디언이자 캐릭터 변신의 귀재 사샤 바론 코헨. 그가 연기하는 데이미언 삭스(Damien Sachs)는 BBC 뉴스 진행자이자 런던 사교계의 자칭 “젠틀맨”이다. 그리고 그의 평행 세계 카운터파트로 등장하는 인물은 로저먼드 파이크가 맡은 알렉스 폭스(Alex Fox). 〈곤 걸〉에서 에이미 던으로 오스카 후보에 올랐던 그 배우가, 이번에는 가부장제를 거꾸로 뒤집은 모계 사회의 톱 앵커로 등장한다. 캐스팅만으로도 호기심이 폭발하는 조합이다.
기본 정보
| 원제 | Ladies First |
| 한국 개봉 | 2026년 5월 21일 |
| 러닝타임 | 94분 |
| 장르 | 코미디, 판타지 |
| 감독 | 테아 샤록 (Thea Sharrock) |
| 각본 | 케이티 실버먼, 신코 폴, 나탈리 크린스키 |
| 음악 | 아틀리 외르바르손 (Atli Örvarsson) |
| 주연 | 사샤 바론 코헨, 로저먼드 파이크 |
| 조연 | 톰 데이비스, 에밀리 모티머, 찰스 댄스, 피오나 쇼, 리처드 E. 그랜트 |
| TMDB 평점 | 5.8 / 10 |
줄거리 — 어느 마초의 거꾸로 된 아침
BBC의 인기 시사 프로 〈굿모닝 브리튼〉의 메인 앵커 데이미언 삭스. 그는 영국 사교계가 사랑하는 남자다. 옥스퍼드 출신의 학력, 부르주아 가문, 깍듯이 다림질된 새빌로우 슈트, 그리고 어떤 여성도 거절하지 못한다는 카리스마. 그러나 화면 밖의 그는 다르다. 여자 후배 앵커들에게 무례한 농담을 던지고, 데이트 앱에서 동시에 다섯 명과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회식 자리에서는 늘 자기 자랑이 끝나지 않는다. “여성의 시대? 농담하지 마. 결국 여자들은 우리 같은 남자에게 끌리게 돼 있어.” 그의 입버릇이다.
어느 금요일 밤, 데이미언은 평소처럼 만취한 채 택시를 타고 첼시의 자기 펜트하우스로 돌아온다. 그리고 토요일 아침, 그는 자신의 침대가 아닌 어떤 좁은 원룸에서 깨어난다. 거리에 나서자 모든 게 이상하다. 광고판의 모델은 전부 여성, 정부 청사 깃발에는 여성 수상의 얼굴, 신문 1면에는 “여성 대통령 재선 확정”. 그가 일하던 BBC 사옥에는 아예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다. 그 자리에는 그가 평소에 무시했던 여자 후배 비슷한 외모의 알렉스 폭스가 메인 앵커로 앉아 있다.
출연진 — 사샤 바론 코헨이 다시 입은 변신의 옷



사샤 바론 코헨은 〈보랏(Borat)〉, 〈디 익텐테이터〉, 〈더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 같은 작품으로 코미디와 정극을 자유롭게 오간 배우다. 그가 데이미언이라는 캐릭터에 부여하는 디테일이 예사롭지 않다. 잘난 척하는 표정 뒤로 슬쩍 비치는 자기 의심, 익숙하지 않은 세계에서 자존심이 꺾일 때마다 발끝부터 꿈틀거리는 신경질. 슬랩스틱적인 과장 연기를 잘 알려진 그의 무기지만, 이번에는 의외로 미세 표정 연기에 더 무게가 실린다.
로저먼드 파이크가 연기하는 알렉스 폭스는 영화의 진짜 발견이다. 〈곤 걸(Gone Girl)〉의 차가운 에이미, 〈I Care a Lot〉의 잔혹한 사기꾼 후견인을 거쳐 온 파이크는 이번에는 “권력을 가진 여성이 권력을 가진 남성처럼 행동했을 때 어떤 모습일지”를 정확히 그려낸다. 회의에서 부하 남자 직원의 말을 잘라먹는 방식, 농담 같은 성희롱을 던지면서 짓는 무심한 미소, “남자가 너무 감성적이면 일을 못 해”라는 대사를 자연스럽게 흘리는 톤. 〈곤 걸〉을 좋아한 관객이라면 파이크의 또 다른 차원의 차가움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조연진의 무게가 가볍지 않다. 〈왕좌의 게임〉 타이윈 라니스터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찰스 댄스가 데이미언의 아버지 격 인물 프레드 파웰을 연기하고, 〈해리 포터〉 페투니아 이모와 〈킬링 이브〉의 캐럴린을 오간 피오나 쇼가 BBC 사장 펠리시티 체이스로 등장한다. 평행 세계의 “남자 동료” 크리스 블랙 역은 영국 코미디 베테랑 톰 데이비스가 맡아, 데이미언이 자주 부려먹던 후배가 이제는 한 수 위의 인물로 등장한다는 아이러니를 자연스럽게 연기한다.
연출 분석 — 테아 샤록, 로맨스에서 사회 코미디로
감독 테아 샤록(Thea Sharrock)은 2016년 〈미 비포 유(Me Before You)〉로 글로벌 흥행을 거둔 영국 출신 연출자다. 이후 〈더 원 앤드 온리 아이반〉으로 가족극을 만들었고, 2022년에는 키이라 나이틀리 주연의 〈더 미니〉를 연출했다. 로맨스와 휴먼 드라마에 강한 그가 이번에는 사회 풍자 코미디에 도전했다.
샤록의 연출은 영화의 톤을 매우 영국적으로 가져간다. 슬랩스틱 코미디라기보다 〈노팅 힐〉이나 〈러브 액츄얼리〉 같은 영국 로맨틱 코미디의 호흡에 가깝다. 카메라는 데이미언의 당혹스러운 표정을 클로즈업으로 잡지 않고, 종종 그의 뒤에서 따라가며 객관적으로 그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풍자의 칼날이 살벌하지 않은 것은 그래서다. 그러나 그 결과 영화는 “사회 비판”이라는 야심에 비해 칼날이 다소 무뎌졌다는 평도 동시에 받는다.
각본 — 케이티 실버먼의 또 다른 변신
각본진의 면면도 흥미롭다. 메인 작가 케이티 실버먼(Katie Silberman)은 〈부커스마트(Booksmart)〉로 평단의 호평을 받고, 제니퍼 로렌스 주연 〈노 하드 필링스(No Hard Feelings)〉로 R등급 코미디의 새 표준을 만든 인물이다. 그녀의 강점은 캐릭터의 “허세 뒤에 숨은 진짜 욕구”를 대사로 드러내는 것. 데이미언이 평행 세계에서 만나는 다양한 여성 캐릭터와 나누는 대화는 그녀의 시그니처라 할 수 있다.
다만 〈노 하드 필링스〉에서 보였던 가차 없는 R등급 유머가 〈레이디스 퍼스트〉에서는 한 톤 낮춰져 있다. 영국 배급 PG-13(국내 15세 관람가) 등급에 맞춰 톤을 부드럽게 한 결과지만, 동시에 풍자가 가장 날카로워야 할 순간에 멈칫하는 인상도 준다. 〈노 하드 필링스〉의 톤을 기대한 관객이라면 약간의 아쉬움이 남을 수 있다.
비주얼 — 거꾸로 된 런던
촬영감독 하리스 잠바를루코스(Haris Zambarloukos)는 〈벨파스트〉,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 〈데스 온 더 나일〉 같은 케네스 브래나 작품으로 익숙한 이름이다. 그가 만든 평행 세계의 런던은 우리가 아는 런던과 미묘하게 다르다. 더 샤프(The Shard)의 광고판은 여성 패션 브랜드 일색이고, 트라팔가 광장의 동상은 모두 여성 인물이며, 골목 곳곳의 그라피티마저 가부장제 비판 대신 “남자도 감정이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 디테일은 미술 감독 제임스 메리필드(James Merifield)의 공이 크다. 영화 중반, 데이미언이 슈퍼마켓 잡지 코너를 들춰보는 장면을 보면 〈Vogue〉의 표지 모델이 전부 남성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 장면 하나에 영화 미술팀이 가짜 표지 십수 종을 직접 디자인해 넣었다는 후일담이 있다.
음악 — 아틀리 외르바르손의 익숙한 비틀기
음악은 아이슬란드 출신 작곡가 아틀리 외르바르손(Atli Örvarsson)이 맡았다. 〈피아니스트의 전설〉의 한스 짐머 사단 출신으로 〈더 캐피탈〉, 〈치즈 인 더 트랩〉, 〈Chicago Fire〉 같은 TV 시리즈로 익숙한 그는 이번에는 익숙한 1990~2000년대 영국 팝송을 비틀어 사용한다. 데이미언이 평행 세계에 처음 도착하는 시퀀스에서 흐르는 음악은 스파이스 걸스의 〈Wannabe〉, 그러나 보컬은 남성 4인조로 새로 녹음되었다. 작은 농담 같지만 영화의 톤을 가장 잘 보여주는 선택이다.
비하인드 & 트리비아 — 이 영화에 얽힌 이야기들
1) 원래 캐스팅은 휴 그랜트였다
〈데드라인〉 보도에 따르면 데이미언 삭스 역에는 초기 단계에서 휴 그랜트가 거론됐다. 〈노팅 힐〉,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그가 자신이 만들어 온 “사랑스러운 영국 신사” 이미지를 자기파괴적으로 비트는 그림이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랜트는 스케줄 문제로 하차했고, 제작진은 캐릭터의 결을 살짝 바꿔 사샤 바론 코헨을 영입했다. 결과적으로 데이미언은 휴 그랜트가 했을 법한 “사랑스러운 한심함”보다 코헨 특유의 “뻔뻔한 한심함”에 가까운 인물이 되었다.
2) 〈곤 걸〉 10주년 마케팅
로저먼드 파이크의 캐스팅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2024년이 〈곤 걸〉 개봉 10주년이었고, 파이크는 그해 한 인터뷰에서 “에이미를 비틀어서 다시 연기해보고 싶다”고 언급한 바 있다. 제작자 리자 채신(Liza Chasin)이 이 인터뷰를 읽고 시나리오를 보냈다는 후일담이 있다. 알렉스 폭스의 일부 대사는 에이미 던의 패러디로 읽히게끔 의도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3) 톰 데이비스의 즉흥 연기
크리스 블랙 역의 톰 데이비스는 영국 시트콤 〈킹 갱(King Gary)〉의 주연으로, 즉흥 연기로 유명하다. 회의실 장면 중 데이미언이 자기 의견을 우기다 망신을 당하는 시퀀스에서 데이비스가 “Mate, just… just stop talking, yeah?”라고 던지는 대사는 대본에 없던 즉흥 라인이었고, 테이크 한 번 만에 통과돼 그대로 영화에 들어갔다.
4) BBC가 자기를 풍자하다
흥미롭게도 영화의 메인 무대는 BBC 본사다. 영화 〈굿모닝 브리튼〉 세트는 실제 BBC 뉴스 스튜디오를 빌려 촬영했고, BBC는 이 영화를 위해 자사 로고, 인터뷰 세트, 심지어 진행자 의상 가이드까지 일부 제공했다. 자기 회사의 가부장적 분위기를 풍자하는 영화에 자사 시설을 빌려준 것 자체가 “BBC다운 일”이라는 평이 트위터에서 화제가 됐다.
5) 평행 세계 BBC의 진짜 여성 앵커들
영화 속 BBC 화면에 등장하는 여성 앵커 카메오 중에는 실제 BBC 진행자 마사 카니(Martha Kearney)와 〈Newsnight〉의 빅토리아 더비셔(Victoria Derbyshire)가 있다. 둘 다 자기 자신을 연기했다.
이 영화를 좋아한다면 — 연관 작품 추천
- 왓 위민 원트(What Women Want, 2000) — 멜 깁슨이 여자 마음을 읽게 된다는 설정. 〈레이디스 퍼스트〉의 가장 직접적인 선조 격 영화.
- 바비(Barbie, 2023) — 그레타 거윅이 가부장제를 컬러풀한 판타지로 풀어낸 또 다른 사회 코미디. 에메랄드 페넬이 재해석한 〈폭풍의 언덕〉 리뷰에서도 비슷한 페미니즘 시선의 재해석을 다뤘다.
- 곤 걸(Gone Girl, 2014) — 로저먼드 파이크의 또 다른 얼굴이 궁금하다면 반드시. 알렉스 폭스의 미소 뒤가 더 잘 읽힌다.
- 아노라(Anora, 2024) — 페미니즘과 계급, 그리고 코미디. 션 베이커가 그린 신데렐라 해체기, 〈아노라〉 리뷰도 가벼운 톤에 무거운 메시지를 얹는 비슷한 방식이다.
- 부커스마트(Booksmart, 2019) — 각본가 케이티 실버먼의 출발점. 같은 작가의 색깔이 〈레이디스 퍼스트〉에 어떻게 묻어 있는지 비교해보면 재미있다.
결말 해석 — 거꾸로 된 거울에서 본 자기 모습
※ 이 단락에는 결말에 대한 가벼운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후반부, 데이미언은 점차 평행 세계에 적응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분노했지만 곧 그는 깨닫는다. 자기가 살던 세계에서 여자들이 매일 겪던 미세한 무례함이 얼마나 누적되어 그들을 짓눌렀는지를. 알렉스 폭스가 회의에서 그의 의견을 짓밟는 방식이, 사실 자기가 평소 후배 여성 앵커에게 했던 행동의 거울임을 알게 된다. 영화의 가장 좋은 장면은 데이미언이 평행 세계에서 만난 또 한 명의 “마초적인” 여성 임원 앞에서 자기도 모르게 사과를 꺼내는 시퀀스다. 그가 무엇에 사과하고 있는지 본인도 정확히 모르지만, 그 어색한 사과가 영화의 진짜 메시지를 압축한다.
결말에서 데이미언은 원래 세계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가 돌아온 세계는 평행 세계가 아니라, 평행 세계에서 배운 시선으로 다시 본 같은 세계다. 모든 것이 그대로지만, 데이미언만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이 결말이 “너무 안전하다”는 평도 있고 “오히려 그래서 현실적”이라는 평도 있다. 어쨌든 영화는 환상적인 사회 풍자가 아니라, 한 한심한 남자의 작은 자각이라는 자리에 안착한다.
총평: 10점 만점에 6점
〈레이디스 퍼스트: 거꾸로 가는 남자〉는 영리한 컨셉과 강력한 캐스팅을 갖고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잠재력을 모두 사용하지는 못한 영화다. 사샤 바론 코헨의 연기, 로저먼드 파이크의 발견, 영국 미술팀의 디테일은 박수받을 만하지만, 영화의 풍자가 가장 매서워야 할 순간 부드러워지는 톤 조절이 못내 아쉽다. 그럼에도 토요일 밤, 가벼운 마음으로 영화관에 가서 머리를 비우고 싶을 때 보기에는 충분히 즐거운 94분이다. 〈노 하드 필링스〉만큼 자극적이지 않고, 〈바비〉만큼 야심차지도 않지만, 그 사이 어딘가에서 자기 자리를 찾는다.
| 스토리 | ★★★☆☆ |
| 연출 | ★★★☆☆ |
| 연기 | ★★★★☆ |
| 음악 | ★★★☆☆ |
| 비주얼 | ★★★★☆ |
| 총점 | 6 / 10 |
누구에게 추천할까
- 〈노팅 힐〉, 〈러브 액츄얼리〉 같은 영국식 코미디의 톤을 좋아하는 사람
- 로저먼드 파이크의 또 다른 차가운 얼굴을 보고 싶은 〈곤 걸〉 팬
- 〈바비〉가 좋았지만 더 가볍게 즐기고 싶었던 관객
- 친구·연인과 가볍게 화제 삼을 데이트 무비를 찾는 관객
반대로 페미니즘 코미디에서 더 날카로운 풍자나 사회적 발언을 기대했다면, 이 영화는 약간 미온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그런 관객에게는 〈바비〉나 〈프로미싱 영 우먼〉이 더 만족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영국 코미디의 따스함 안에서 한 남자가 자기를 마주하는 작은 순간을 보고 싶다면, 〈레이디스 퍼스트: 거꾸로 가는 남자〉는 그 자리를 정확히 채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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